나는 '세계'라는 기표에 집착한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거다. 지역과 공간, 혹은 시간이라는 범위 내에서 정의되는 물리적 세계도 그러하지만, 내가 좀 더 관심을 두고 있는 세계는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세계'다. 그리고 나의 궁극적인 관심사 중 하나는 개인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의 '관계'라고 거칠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닭과 달걀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과도 비슷한데, 내가 그나마 지속적으로 위와 같은 관심사를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건 인문학과 (일부) 소설들 덕분이다. 인문학과 소설을 통해 내가 들여다볼 수 없는 타인의 세계를 엿볼 수 있고 또 '세계'를 상상할 수 있으니까, 가 가장 크겠다. 가급적 읽지 않으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듯 소설을 집어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은, 내게는 실패한 선택이었다. '타인의 선함과 악함을 구별짓는 기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와 같은 물음이 얻을 수 있는 결론이라니. 결국 이건 개개인의 세계가 모두 같을 수 없다는, 그리고 상당 부분 생존적 이해관계와 폭력적 구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걸 새삼 확인시켜주는 정도다. 나는 '저 입장에서는 저럴 수도 있지'와 같은 정리를 원하지 않는다. 이쪽이 우위에 서 있음에 안도하는 '저 입장'이란. 차라리 1인칭 시점으로 쓰여졌으면 이렇게 허무하지는 않겠다.1
흔히들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고 싶었던 건 알겠는데, 그냥 거기까지다. 저마다의 세계는 같지 않다, 라고 정리하는 수준이라고 해두면 될까? 차라리 나는 '도쿄바빌론'의 솔직함이 좋다. 일전에도 블로그에 잠깐 언급한 적이 있는 일본만화 '도쿄바빌론'을 지금까지 애장하고 있는 건 기존의 선악 관념에 대한 클램프 특유의 시선이 여전히 생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만화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막 뜯은 면도칼의 칼날과도 같은 타자와의 선긋기는 때때로 그만큼의 거리감을 불러일으키곤 하지만. 적어도 '악인'보다는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생각거리들을 얻을 수는 있다.
어쨌든 잘 팔린 소설이었다고 하니, '악담'은 여기까지만 해야지. 다만, 직접 돈 주고 사서 본 책은 아니라는 점에 그나마 안도.
- 물론 노골적으로 이렇게 정리되지는 않지만, 환경과 반응조건이 중요한 것도 알지만, 그리되면 '경찰청 사람들'과 뭐가 다를는지. [본문으로]
바로 이와 같은 지점에서, 나는 종교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 종교란 따져묻을 수 있는지 여부를 타진하는 순간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종교가 학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그렇다. 타인이 쉽게 침범할 수 없는 '믿음'을 기반에 두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나는 조인성을 사랑해'와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는데다가, 설사 내가 조인성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걸 타인이 가타부타 할 수는 없지 않나. (물론 조인성이 나를 사랑하는가와는 완전 별개의 문제이며 또한 그렇지 않다는 게 누가 보아도 확실하기 때문에 100% 옳은 비유라고 할 수 없지만-ㅅ-)
그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 저마다 가지고 있는 종교에 대해 앙케트를 실시한 결과 퍼센테이지의 총합이 100을 넘는 기이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심지어 국가 수도의 장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시를 바친다는 지랄뽕빨나는 소리나 해대는 그런 곳에 살고 있다 보니 뜻대로 무관심하게 지낼 수만은 없다. 더군다나 이 문제가 종교를 '믿는' '사람' 쪽으로 건너오면 사태는 더욱 복잡미묘해진다. 수많은 종교인과 그에 필적하는 안티들로 북적이곤 하니까.
이러한 상황을 틈타 대박난 책이 하나 있는데 바로 '만들어진 신'이다. 읽다읽다 짜증나서 채 반도 읽지 않고 던졌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서평을 쓸 수는 없지만, 별로 쓰고 싶지도 않은 책이다. 순수 무신론자인 저자가 '신은 없다, 종교는 거짓이다'라는 테마로 쓴 책인데 이건 뭐, '사랑은 뇌에서 특정 호르몬이 나와 생기는 것이므로 유효기간이 2년이다'라는 전제로 근거들을 긁어모아 남녀관계 일반에 적용하려는 시도와 별 차이가 없다. 이러한 접근방식이 낳는 가장 큰 단점은 '그래도 나는 달라'로 귀결될 가능성의 지름길을 열어준다는 거다. 그러고 나면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해진다.
기성(거대)종교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훌륭한 마스터베이션 교재가 되어줄 것이고,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종교에 대한 반대논리에 더욱 귀를 막게 해줄 샘플이 되어줄 그런 책. 그 이전에, 왜 대박 났는지 참 신기한 책. 뭐, 옥스포드 석좌교수가 쓴 만큼 근거의 해박함과 풍부함에까지 무어라 할 말은 없다만 도대체 누구 읽으라고 쓴 책인지. 저술목적도 참 미스터리다. 종교인이든 안티종교인이든 각자의 영역에나 더욱 충실하라 이건가.
하긴. 애초에 불가론자인 내가 이런 책을 읽으려 했다는 것 자체가 에러다. 제목에 잠시 혹해 책을 집어들었던 스스로의 천박함에 반성해야겠다. 여전히 갈 길은 멀고 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