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이름 없는 독(名もなき毒)'은 이른바 서민탐정인 스기무라가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시리즈 중 하나다. (사실 스기무라 시리즈라고 보기에는 권수가 좀 적지만.) 평범한 남자 스기무라는, 일본 굴지의 대기업인 이마다(今多) 가의 막내딸이자 외동딸인 이마다 나오코(今多菜穂子)와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되고, 이마다 콘체른과는 연관을 맺지 않는 대신 본사 사보팀의 직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을 위해 나오코의 아버지, 즉 이마다 콘체른의 회장은 스기무라를 회사의 직원으로 삼는 동시에 회사 내에서 출세가도와는 조금의 인연도 없는 부서에 넣어버린 것이다. 어쨌든 스기무라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약했던 부인 나오코의 건강을 제외하면 이 삶에 별다른 불만도 걱정도 없다. 그에게는 부인과 딸 모모코가 세상의 전부이니까.
스기무라 탐정 시리즈는, 사람 좋은 걸 빼면 남는 게 없는 스기무라가 어쩌다보니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면서 조금씩 헤쳐나가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이 책 '이름 없는 독'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날 발생한 무차별 독살 사건. 시크 하우스 증후군. 그리고 사내 사보팀에서 끊임없이 문제만 일으키다 퇴사당하고, 이후 어처구니없는 행각을 벌이는 전 아르바이트생 겐다 이즈미(原田いずみ). 이렇듯, 겉으로 보기에 일말의 관계도 없을 것 같은 사건들은 결국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된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름 없는 독'이 그것.
무릇 거의 모든 독들은 나름의 명칭이 있다. 소설에서처럼 독극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시크 하우스처럼 집 혹은 토지의 문제로 사람이 병들 수도 있으며 이런 것들은 대체로 이름이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를 죽인 독극물의 이름이 무언지, 주택부지를 오염시킨 물질은 무엇인지, 우리는 대체로 이 독들의 이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또 하나의 독이 있으니, 바로 '인간'이다. 타인을 상처입히고, 괴롭히고, 절망에 빠뜨리거나 희망을 앗아가는. 때로는 죽음으로 내몰게 하는. 이 독을 도대체 무어라 명명해야 할까. 하루 중에도 적지 않게 조우하는, 살아가면서 절대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이 독을.
겐다 이즈미는 분명, 독을 가지고 있다. 그 독 때문에 여러 사람을 힘들게 했고 지금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그건 단지 그녀가 보통의, 아니면 정상이 아닌 사람이기 때문일까? 소설 속의 대화를 잠시 인용해 본다.
키타미: 예,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스기무라: 저는 그 말씀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거짓말쟁이이고, 어떻게 보아도 보통의 인간은 아니지 않을까요.
키타미: 그렇다면, 보통의 인간이란 건 어떤 인간입니까?
스기무라: 저나 당신이 보통의 인간이지 않습니까.
키타미: 아닙니다.
(중략)
키타미: 당신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키타미 씨는 지친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키타미: 이렇게나 복잡하고 귀찮은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때로는 친절히 대해주는데다가 함께 사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지요. 훌륭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스기무라: 저는 그런 게 '보통'이라고 생각합니다.
키타미: 지금은 다릅니다. 그 정도의 일을 해낼 수 있으면 훌륭한 거예요. '보통'이라는 건 지금 세상에서는 '살기 힘들고 별달리 잘하는 것도 없다'와 동의어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보잘것없고, 지루하고, 공허한 것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 어떤 배경에서 비롯되는 것보다도 인간에게서 받는 상처가 가장 크고 깊다. 그리고 상처의 크기와 깊이는 천차만별이겠지만 때로는 회복되기도 힘들다. 수험생일 때에는 공부 때문에 힘들고, 일을 하면서는 그 나름대로 또 괴로울 수도 있으나 거기서 벗어나면 그저 지난 일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죽을 때까지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야만 한다. 그러면서 누군가가 내뿜는 독에 다칠 수도 있고, 또 내가 타인을 주저앉게 할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독은 멈출 줄을 모른다.
어릴 때에는 이형의 존재가 싫고 무서웠다. 그리고 지금은 인간이 그러하다. 하지만 우습게도 나 또한 인간이라, 때로는 타인에게 느끼는 참을 수 없는 그 역겨움과 절망을 스스로에게서 발견하고는 한다. 어쩌겠는가. 그래서 나의 삶은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또 어떠해야만 하는지를 찾아내려는 몸부림의 연속인 건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 인간으로서의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왜,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험하게 굴렸더니 좀 많이 낡았다.
사실 그다지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중간에 겐다 이즈미의 행동들이 하도 짜증나서 건너뛰며 읽은 부분도 있고 한 만큼. (솔직히 말하면, 이걸 산 게 재작년인데 재미없어서 대충 굴리며 읽다가 얼마 전에야 다 읽었다.) 다만 인간이라는 독에 대해 고민하는 혹은 생각해보고픈 이에게는 추천할 만 하다. 또한 내가 산 건 일어판이지만 2006년에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나온 걸로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책의 일부 구절을 인용할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 바로 독이기 때문에.
그 독의 이름은 무엇일까.
옛날, 어두운 정글을 누비고 다니던 짐승의 송곳니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짐승을 잡아 사자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인간은 그 짐승을 퇴치하는 법을 겨우 찾아냈다.
이름이 붙여지자 모습도 없던 공포에 형체가 생겼다.
형체가 있는 것이라면 잡을 수도 있다. 없앨 수도 있다.
나는 우리 안에 있는 독의 이름을 알고 싶다.
누가 내게 가르쳐다오.
우리가 품고 있는 독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리적이고 단선적인 의미에서 세계는 하나다. 지금은 서기 2008년이고, 발칸 반도는 코소보 독립 선언으로 풍전등화 상태에 놓여 있고, 대한민국은 새 정권 출범부터 들썩인다. 자본가 계급도 노동자 계급도 아닌 범주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세계 도처에서 고통 받고 있고, 누구는 2억짜리 골프 회원권이 싸구려라 하는 그런 현재. 각각의 일들은 독립된 변수인 듯 하면서도 결국 2008년의 지구, 를 시공간적 무대로 삼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동일한 삶의 전제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저마다 동일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다. 자신이 속해 있는 환경, 직업, 다양한 기호, 가치관과 같은 요소를 통해 자기만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수십 억의 인구만큼 동일한 숫자의 세계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한 탓에 혹자는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과 같다”고도 하지 않았던가.
그 세계의 중심에 있는 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의 정체성일 거다. 다만 양자의 관계는 유동적이어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따라 세계를 구축하기도 하고, 혹은 속해 있는 세계 속에서 정체성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어쨌든 ‘세계’와 ‘정체성’은 A라는 한 사람이 지금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선언과 같다. 나는, 나의 정체성과 나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소설 ‘모방범’의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마츠모토 세이쵸의 뒤를 이어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가로 자리잡고 있는 소설가다. 현대 일본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추리 소설 기법을 풀어내어 함께 고민하게 만드는 선동가이기도 하고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면모도 있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팬이기도 하며, ‘모방범’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중에서도 내가 감히 최고라 이야기하고픈 작품이다.
고등학생 소년인 츠카다 신이치는 1년 전 불의의 사고로 양친과 여동생을 잃었다. 자신을 제외한 일가족이 집에서 무참히 살해당했으며, 그 현장의 최초 목격자가 바로 신이치였다. 범인들은 바로 체포되어 재판 중에 있지만 신이치의 상처는 아물 줄 모르고, 그는 과거의 기억에서 그저 도망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마다 조깅하며 들르던 공원에서 우연히 여자의 팔과 핸드백이 쓰레기통에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 전체를 술렁이게 만든다. 석 달 전 퇴근하던 딸(후루카와 마리코)이 돌아오지 않아 노이로제 상태에 있던 후루카와 마치코는 그 팔이 자신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버지인 아리마 요시오와 함께 경찰서로 가지만 딸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리마 요시오, 즉 후루카와 마리코의 외할아버지는 어느 날 음성을 변조한 누군가의 전화를 받는다. 손녀가 어디 있는지 알려 주겠다며 노골적으로 아리마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상대방. 한편 신이치의 앞에 한 여자아이가 불쑥 나타나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용서해 달라며,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었고 너만 용서해 준다면 아버지는 감형될 수 있다며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그 여자아이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살인자들의 주동자의 딸이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스포일링의 연속이므로 여기까지만 써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전체 이야기의 대략 1/15 정도에 불과하다. (새로운 그리고 중요한 등장인물들도 줄줄이 나온다.) 뒤를 예측할 수 없으며, 계속해서 나의 상상을 비웃듯 비껴간다. 그러한 까닭에 처음 이 책을 보기 시작했을 때 다음날 오전 수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손에서 놓지 못해 밤을 샜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생생히 살아 있다. 캐릭터 설정이 분명하고 또 저마다 가지고 있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외면하며, 때로는 상처 받다가 서로 공감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살아온 인생이 다르고 속해 있는 환경도 다르며 가치관도 세계관도 다른 사람들이 일련의 사건에 관련되면서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다시 세우기도 하는 모습들을, 작가는 ‘희노애락애오욕’을 고스란히 담아서 그려내고 있다.
세계의 붕괴와 구축. 이 과정은 주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세계의 주체인 ‘나’의 자아와 정체성에 따라 얼개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체성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인가? ‘나’는 무엇으로 그리고 무엇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인가? ‘나’라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하나의 개체로서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 가능한가? 이 소설의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은 결국 이러한 물음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물리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과 인간으로서 살아 있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양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답을 명쾌하게 제시하기란 불가능할 거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갈무리되어 마음 속에 남는 무언가가 있다. 마지막까지 읽고 나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컥, 하고 뜨거운 게 치밀어 올랐었다. 미야베 미유키는 좋아함을 넘어서서 존경할 수밖에 없는 작가다.
국내에서 총 3권으로 번역되었다. (다만, 번역본은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이 소설은 2001년에 일본에서 출판되었고 나는 2004년에 일본어판으로 읽었기 때문에 느낌이 약간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지간해서는 책을 추천하지 않지만, 이 소설은 예외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함께 고민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와 ‘당신’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