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일본 부락의 역사

오래됐다면 오래된 사건일 수도 있지만, 1963년 일본 사이타마 현 사야마 시에서 16세 여고생이 행방불명되었다가 결국 사망한 채 발견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수사 당국은 24세의 청년, 이시카와 카즈오(石川一雄)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원래는 다른 건으로 기소되었던 이시카와였으나 경찰은 ‘필적이 비슷하다'는 등의 이유로 그를 범인으로 몰았고, 무혐의로 풀려난 이시카와를 해당 여고생 사건의 범인으로 다시 체포한 경찰은 그에게서 ‘자백'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시카와 본인이 제1심 공판에서 그 ‘자백'을 뒤엎음으로써 본격적인 ‘사야마 사건'이 전개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백하면 형을 줄여주겠다'는 경찰 측의 강력한 제안이 있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범인으로 단정지을 만한 여러 증거 및 정황들이 터무니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시카와에게 혐의가 씌워진 까닭은 그가 이른바 ‘부락민', 이기 때문이라는 것.

부락 및 부락민은 무려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일본 내 피차별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고대와 중세, 근세의 그 양상은 제각기 분명히 다르지만, 주로 거주지 및 직업 등과 같이 특정 조건을 갖춘 이들을 ‘함께해서는 안 될 부류'로 나누어 유무형의 차별을 가해온 게 일본의 역사이기도 하다. 부락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에타와 히닌, 수평사 정도의 키워드는 들어봄직 한 단어들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그리고 얼마 전, ‘차별과 싸워온 천민들의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서
『일본 부락의 역사』라는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일본부락해방연구소가 지은 이 책은 원래 3권짜리로 되어 있는 것을 1권의 약사로 줄여 묶었고, 이를 다시 국내에서 번역했다.  

일본 부락의 역사 - 10점
일본부락해방연구소 지음, 최종길 옮김/어문학사

부락의 역사가 워낙 길고 또 그 내용도 시대마다 다르기 때문에 몇 줄로 요약하기란 힘들지만, 고대-중세까지만 해도 비교적 자유로웠던 부락 집단은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철저한 신분제 사회의 최말단에 놓였고, 이 신분제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지배 계층의 의도에 따라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분제가 철폐됨에 따라 그나마 누려왔던 권리(예를 들면 피혁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얻는 물질적 이득)도 잃고, 잡역 내지 육체 노동자로 전락하면서 사회의 밑바닥 계층으로 전락해버리는, 그러면서 부락에 대한 기존의 의식-천한&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존재-은 그대로 떠안게 된 이들이 부락민이다.  

그러나 부락은 그저 지난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니라는 데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 부락 출신 사람들은 여전히 차별 받고 있고,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 취급당한다. 일상 생활은 물론이거니와 교육, 취직, 결혼 등과 같은 삶의 기본 단계들마저도 부락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쉬이 통과하지 못한다. 믿기 힘든 사례들이 숨돌릴 틈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70년대에 300만 정도의 규모였다고 하니, 결코 적은 숫자도 아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부락민이라는, 부락에서 태어났다는, 부락에서 산다는 것 때문에 낮은 삶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3권짜리 책을 1권으로 요약한 것이라 그런지 내용이 다소 빡빡해서 읽어내려가기에 쉽지만은 않지만, 정독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 이것이 비단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니기도 하고. 물론 부락의 역사는 그 자체로 매우 끔찍하나 거주지 혹은 직업, 나아가 태생이 차별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지 않은가. (얼마 전에 인터넷을 달궜던, 경희대 청소부 사건을 생각해보라. 그 사건은 패륜이라는 윤리적 키워드보다도 ‘청소부'에 보다 초점이 맞춰졌어야 했다.) 구조화된, 그리하여 공인된 차별만큼 잔혹한 폭력이 또 있을까.

부락민으로서의 그 삶이 상당 부분 그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한심한 편견에 대해 저자는 "부락차별이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차별발언과 차별적인 행동, 차별의식뿐만 아니라 부락민이 처한 열악한 실태야말로 차별이다"(pp.299~300)라고 말한다. 그리고 일본의 부락 해방 운동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책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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