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환상성-전복의 문학: 환상문학을 재정의하다

로지 잭슨의 '환상성-전복의 문학'은 읽는 데 꽤 많은 심력을 소모시킨 책입니다. (문학이론에 젬병이었던 까닭에 토도로프와 관련된 해당 파트를 읽어내기가 좀 버거웠어요) 이 책은 이론-텍스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단 한 번 읽고 난 다음 이론 중 환상문학론 부분만 다시 읽으니 좀 낫네요.

환상성 - 10점
로즈메리 잭슨 지음, 서강여성문학연구회 옮김/문학동네

잭슨은 환상문학이 기존의 체제를 전복시킨다고 이야기하며, 토도로프의 환상문학론과 맑시즘, 그리고 라캉의 이론을 빌려오죠. 저자는 이러한 방법론들을 통해 환상문학이 단지 문학의 하위 장르가 아님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환상문학은 통상 '일상적이지 않은 것', '상상력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 '신비로운 이야기' 정도로 간주되기 쉬우나, 잭슨은 환상문학 그리고 환상성을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고 또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낯익고 친숙한 세계를 '기이하게' 변형시키는 것이 환상문학의 특질인데, 여기서 말하는 '기이함'이란 전복적 기능의 모태가 됩니다. 실재와 비실재,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 공간(즉 '점근축'의 영역)에 웅크리고 있는 숨겨지고 억압된 욕망들을 끄집어 내서 낯익음을 낯설게 하는 것이죠. 그리하여 무의식 속에서 재생산되고 또 유지되는 사회 구조와 규범, 체제들을 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읽어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야말로 환상문학이 지니는 전복적 의미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지배 질서를 교란시킬 수도 있겠구요. 

물론 모든 환상문학이 필연적으로 전복적 기능을 수행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적지 않은 환상문학은 '기이함'으로 현실을 위반하지만, 결국에는 기존의 지배 체계를 옹호하고 드러난 문제점들을 봉합해버리기 때문이죠. 결과적으로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수호자라고나 할까요. 잭슨의 논지에서 봤을 때 진정한 환상문학의 계보는 메리 셸리에서 시작해 디킨즈와 도스토예프스키를 거쳐 카프카, 그리고 핀천에 이르는 것 같네요.

환상문학의 정치학적 지형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특히 '환상문학'이라 했을 때 해당 범주로 뭉뚱그려 생각하기 쉬운 여러 작품들을 엄정하게 구별짓고 있다는 게 특기할 만 합니다. 일례로 톨킨의 저작들이 위에서 언급한 '수호자' 범주에 든다고 잭슨은 이야기하는데, 현실 너머의 세계를 완벽하게 창조해냈지만 해당 세계를 소비함으로써 다시금 현실로 안착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죠. 적어도 잭슨에 따르면 '위반'과 '전복', 이 두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어야 비로소 환상문학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읽기 쉽지 않은 책이어서 약간의 고통도 따랐지만, 이렇게 가학적인 책읽기를 하고 나면 비교할 수 없는 짜릿함이 기다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에요. 고통스러운 읽기를 선사하는 모든 책이 그러하지는 않으나 대체로는 적지 않은 것들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이 책 읽기를 끝마치고 난 뒤 이틀 동안은 조증 상태였다는. (요즘 '과객'님이 제게 큰 기쁨을 주고 계십니다^^) 

덧붙여 이론 파트에 대해 내용을 더 쓰지 않은 이유는, (환상문학론은 둘째치고서라도) 맑시즘과 라캉의 방법론을 몇 줄로 적기란 안 하느니만 못 하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으로 상당 부분 빚을 지고 있다 보니 더욱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다만.. 점근축의 영역에 숨겨져 있는, 억압된 욕망의 발현을 통한 현실 위반과 전복, 이 환상문학의 본질이라는 논리는 매력적이나 그만큼 섬뜩합니다. 욕망은 '추구하는 것'과 '만족된 것' 사이에 존재하는 제논의 역설인 까닭에. 전복된다 해도 또 다른 '현실'이 자리하겠죠.
언젠가.. 그람시를 진정 이해할 날이 온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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