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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7 10:26

1994년도 드라마였던 것 같다, 기억에. '아스나로 백서(あすなろ白書)'라는 제목의 이 드라마는 20대 초반에 대학에서 만난 젊은이들이 고민하고 방황하며 자신의 인생을 조금씩 밟아나간다는 뭐 그런 전형적인 일본드라마 중 하나였는데 여기에 키무라 타쿠야(木村拓哉)가 조연으로 나왔었다. 내가 이 드라마를 본 게 중학교 3학년 때라서 등장인물들의 고뇌에 별로 동감하지는 못했지만 키무라만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더랬다. 단적인 예로, 주인공 남자배우의 극중 이름은 커녕 본명과 얼굴조차 기억이 안 나는데 키무라의 캐릭터는 지금까지도 꽤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 (아. 도대체 몇 년 전이야, 이게.- -)

그렇지만 키무라라는 배우가 제대로 각인된 건 2시간짜리 단편 드라마인 '그대는 시간의 저편에(君は時のかなたへ)'였다. 1995년도 드라마였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갑자기 타임슬립해서 현대로 떨어진다는 꽤 황당한 스토리였던 데다가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키무라의 모습이 정말 묘하게 배역과 잘 어울렸다. (지금 이 드라마를 다시 구해보고 싶지만 검색의 달인인 나로서도 gg..) 그 때 이후로 팬이 된 것 같다. (당시 일본잡지를 매달 사서 키무라 부분만 별도로 스크랩하기도 했다- -) 그리고 실제로 96년 정도부터 키무라의 인기는 끝을 모를 만큼 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1996년 드라마인 '롱 베케이션'은 키무라 첫 단독주연 드라마였는데 결과는 대성공. 이후로는 승승장구. 지금은 명실상부히 일본 연예계를 대표하는 얼굴 중 하나다.

'시청률의 남자'라고 불리기도 하는 키무라 타쿠야의 매력은, 전혀 현실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인물에 현실감을 입혀내는 데에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가 연기해 온 배역들을 살펴보면 사실 굉장히 키무라스럽다. 다른 배우가 대신 그 역할을 맡는 걸 쉬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히어로(HERO)'의 쿠리우 검사를 키무라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상상하기 힘든 것처럼. 그리고 너무나 비현실적인 캐릭터인데도, 그게 어색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탁월한 능력은, 사람들에게 그 자체로 희망을 심어주는 데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다만 몇 해전까지는 뭐랄까, 너무 거물이 된 나머지 아예 '키무라스러움' 자체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드라마들에 속속 출연해서 키무라가 나오는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았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1억개의 별'까지, 가 좋았었으니까. '엔진', '굿럭', '프라이드'의 경우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별로였다. 그냥, 키무라 자체에 묻어가려는 그런 드라마 같아서. 아마 '젊은이의 모든 것(若者のすべて)'나 '인생은 최고다(人生は上々だ)', '롱 베케이션' 무렵의 키무라 타쿠야를 더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지만. '화려한 일족(華麗な一族)' 이후 다시 연기에 좀 더 무게를 두는 쪽으로 비중을 두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런 키무라 타쿠야가 연기하는 일본 총리, 는 어떤 모습일까? 일본 후지테레비는 35세라는 나이에 일본 헌정 사상 최초의 젊은 총리가 된 남자, 아사쿠라 케이타(朝倉啓太)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내보내고 있다. (물론 픽션이다) 드라마 '체인지(CHANGE)'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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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후지테레비 해당 웹사이트 화면. 아..저 뽀글머리- -;(서서히 변신 중임)


물론 이 드라마는 주인공 자체가 워낙에 '잘나서' 정치인의 행보에서 파격행진을 이어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더군다나 후지의 겟쿠(月9)인 까닭에 근본적인 한계도 어쩔 수 없이 있으리라 본다. 그렇지만. 정치가의 아들로 태어나 세상이 싫어 시골 초등학교 교사를 택한 한 남자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치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점차 변화해 가는 (혹은 이 남자로 인해 주변이 변화하는) 그런 드라마틱한 드라마다.

아래 사진들은 일본에 있었을 때 호텔방에서 찍은 것. 영광스럽게도 체인지 1화를 일본에서 보게 되었다는. (뭐가 영광; ) 촌스런 뽀글머리가 저렇게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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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아버지의 부정에 대해 후보연설 중 사죄의 말을 대신 하는 주인공, 아사쿠라. 20년 전의 일이 이제와 불거져나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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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였고, 결국 연까지 끊고 살았지만 아버지의 부정행위를 부인할 수도 없었던 아사쿠라는 끝내 투표전날 유권자들에게 대신 사죄를 하며 머리를 숙인다. (일본에서 '머리를 숙인다'는 건 매우 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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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무라 타쿠야가 아닌 이상에야 누가 이 드라마에 어울릴까? 누가, 35세의 총리를 연기할 수 있을까? 이, 현실감 없는 드라마에 누가 적합할까를 생각해보면 답이 안 나온다. 그냥 이 드라마는 키무라를 위한 드라마인 거다. 소심하고 서투르지만, 그리고 투박하지만 결국 그로 인해 주변 세상이 달라지는 연기를 일관되게 해 왔던 키무라가, 드디어 이제는 일본을 바꾸는 연기를 하게 된 거다. 어찌 기대하지 않을 수 있으랴.

더군다나 조연들도 아주 빵빵하다. 처음에는 100% 타의로 키무라를 돕는 전 재무성 관료 출신으로는 후카츠 에리가, 선거 플래너로는 아베 히로시가, 그리고 전적인 후원자와 조력자(아직까지 별 힘이 되고 있는 것 같진 않지만) 카토오 로사가 등장해 주신다. 개인적으로 카토오 로사를 참 좋아하기 때문에(그냥, 예쁘니까) 왠지 흐뭇.

덧붙여 이 황당무계하면서도 두근거리게 만드는 드라마에 묵직한 현실감을 얹어주는 훌륭한 조연으로, 테라오 아키라(寺尾聰, 극중에서는 칸바야시(神林正一)라는 이름이며 일본정우당 총무회장)를 꼭 언급해야 할 것 같다. 2화 보다가 소름이 끼쳤을 정도다. '저게 정치인인 거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달까? 일본 드라마는 이렇게 훌륭한 연기를 펼쳐주시는 조연 배우들이 탄탄해서 아무리 젊고 연기력 없는 애들을 갖다놔도 대충 드라마가 굴러간다.(아, 이 드라마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물론 절대 아니다)

이제 겨우 3화까지 방영되었을 뿐이지만 매주 월요일 저녁을 즐겁게 기다리게 해 주는 드라마.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갈망에 물뿌려주는 그런 드라마. 다시 읽어보니 횡설수설하고 있지만, 적어도 재미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게 해 주는 드라마. (심지어, '그냥 이대로 진짜 총리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는 생각까지 든다)

후지테레비 웹사이트에 가면 아래와 같은 이미지가 있는데, 문구가 멋져서 퍼왔다.

'일본을 바꾸는 것은, 당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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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일본 위키피디아에서 드라마 정리를 잘 해놓았음. (해당 페이지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