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17 13:41
[책과책읽기]
이미지 출처: Amazon.com
1957년 일본. TV는 당시 일본에서 약 8만 5천 엔에 팔렸다. 평균 도시가구의 2달 반치 소득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3년까지 전국적으로 80%의 가구가 TV를 보유하게 된다. 광고 산업의 성장과 맞물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소비-특히 가전제품-해야 할 유혹에 시달리고는 했다. 여기에는 통산성의 관료들을 비롯한 정치가와 기업가들이, TV 방송이 국가적 자부심을 고양시키고 사기를 진작시키며 문화를 풍부하게 할 것이라고 보았던 데에 그 원인이 있다.
소위 '철의 트라이앵글'은 TV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냉전 체제에서 우위를 굳히려던 미국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표면상으로는 미국의 민주주의 전파를 받아들이면서 이 과정에서 주어졌던 다양한 대가들을 흡수했고 군사적으로 미국의 우산 아래에 있는 것을 택하여 절감하게 된 군사비를 경제부문에 투자하였으며 번영의 상징이라고 여긴 미국식 시스템을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일본의 부흥에는 이와 같은 각계의 전략이 뒷받침되어 있었으며, 사이먼 파트너(Simon Partner)의 Assembled in Japan은 그 배경과 과정을 써내려간 책이다.
1950년 이전까지 일본 가정 내 주된 소비는 식료품이었다. 지리멸렬한 전쟁이 끝나고 피폐해진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그저 기본적인 생활 영위 그 자체를 걱정해야만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TV방송이 1953년에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2년 전인 1951년만 해도 미국에서는 이미 천2백만 가량의 세트가 팔렸지만 일본은 TV 방송국조차 없었다. 1953년이 되어도 사정은 비슷했다. TV 한 세트가 약 470달러였던 것에 비해 1인당 평균연봉은 97달러에 불과했던 일본. 왜 일본은 TV 산업을 이토록 서둘렀을까?
미국의 역사학자 앤드류 고든에 따르면, 1945년 전후로 여러 해 동안 수백만 일본인이 굶주렸고 실제로 수천 명이 굶어죽었다. 서민가구는 1946년에 수입의 68%를 식비로 지출했고 암시장에서 대부분의 경제행위가 일어났다. 일본의 경제학자인 나카무라 타카후사는 당시 일본의 실업률이 저조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는데, 실업은 곧 굶주림을 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먹을 것이 없어 의복까지도 팔아야만 했던 당시의 일본 사회는 물질적 빈곤과 정신적 허탈감에 휩싸여 있었다.
점령군은 이와 같은 일본사회를 재건하고자 했다. 바로 미국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인력과 언어능력의 부족을 이유로 기존의 관료제를 통해 변화를 추진하는 간접통치방식을 택했다. 이는 관리와 전시 엘리트들이 점령군의 지시에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사실 점령 기간 중 정부의 경제통제는 전간기보다도 높은 수준이었다.) 어쨌든 점령군에 의해 주도된 무장세력해체, 재벌해체, 농지개혁, 헌법개정 등은 대대적인 민주화 열풍을 일본에 가져왔고, 그 때까지 일본이 가지고 있던 관습이나 제도들은 모두 미국식으로 바뀌어 나가는 듯 했다. 1
그러던 중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특수’라고 불릴 만큼 일본에게 거대한 기회를 제공해준 사건이었지만, 한편으로 TV 산업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들어설 수 있게 한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중국의 공산화에 뒤이은 한국전쟁은 미국이 위기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고 TV가 ‘보는 폭탄’으로 인식되면서, 미국은 TV을 일본 내 공산화를 막기 위한 효과적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일본을 비롯한 4개국에 TV산업을 시작하려고 했던 미 상원의원 문트의 발언은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한편 전쟁을 체험하고 그 과정에 참여했던 전간기(interwar period) 일본의 리더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아, 그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일본을 재건하고자 했다. NTV를 세운 쇼리키 마츠타로는 말할 것도 없으며,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일미안전보장조약의 주인공인 총리 요시다 시게루는 1930년대의 외교관이었다. 일본 내에서도 상당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던 미일안전보장조약의 핵심인물이었던 요시다 시게루는 오랫동안 미군을 주둔시키고 미국의 우산 아래에 있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요시다의 뒤를 이어 사토 에이사쿠,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1957~1972년 일본경제를 주도했던 이케다 하야토 또한 ‘소비자 혁명’과 ‘수출진흥책’이라는 두 가지를 바탕으로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는 비공식적으로 은행관계자 등을 모아 TV 산업을 지지할 것을 논하기도 하는 등 정치가들 또한 TV 산업을 지지했다. RRC가 쇼리키의 NTV에 라이센스를 허가한 것도 정계로부터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쇼리키는 자신의 캐리어를 미끼로 삼아, 그를 후원해 주는 집단과 함께 TV 산업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를 벌였다. 사실 쇼리키의 적극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TV 산업의 시작은 조금 더 늦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는 TV이 가지는 영향력과 이익, 그리고 힘을 절대적으로 신봉했다.
그리고 일본의 고도성장을 논하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존재, 통산성. 기술통제와 행정지도를 바탕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통산성은 1951년 중반 TV를 일본 내에 들여올 것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기로 한다. 미국에 있어 일본은 냉전의 중추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일본이 그 대가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선진기술이었다. 통산성의 고위간부들 또한 기술이야말로 미래에 번영을 가져다주는 열쇠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기술의 중심에는 TV이 있다고, 통산성은 믿었던 것 같다. 이는 통산성이 TV의 도입과 발전에 쏟은 노력들을 보면 알 수 있다. 2 또한 통산성은 행정지도라고 불리는 것을 통해 수입을 규제하고 국내 산업을 보호하며 특정 산업-TV를 포함한-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1950년까지 통산성은 점령당국의 지원을 받아 해외로부터 기술수입과 구매를 추진했다. 나아가 경제관료들의 강력한 무기인 외환과 기술수입 통제권을 적극 활용했다.
그러나 통산성은 장기간의 연구를 걸친-전통적인 방식의-국내생산보다는 기술과 부품을 해외-특히 미국-로부터 들여오는 방식을 택한다. 여기에는 쇼리키 및 그의 지원자들로부터 들어오는 압박 탓-미국식 방식을 채택하여 하루빨리 TV를 들여오는 것에 대한-도 있었지만, 하루빨리 TV을 일본에 소개해야만 했기 때문이 컸다. 그러기에는 국내 기업들의 기술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통산성은 쇼리키와의 합작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과 다름없다.
통산성 외에도 여러 관계부처들이 TV 산업의 발전에 힘썼다. 예를 들면 대장성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대해 그러했던 것처럼 TV에 대해서 대량생산을 통해 가격이 낮추어지게 된 2년 후부터 물품세를 부과하는 등의 정책을 통해, 대부분의 가정이 특정시기에 동일한 제품을 사들이는 현상을 초래했다. 3종 신기와 같은 사회성 신조어가 등장하게 된 것도 이러한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들여온 것은 TV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기술과 부품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것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마케팅 기법도 일본 내로 가져왔다.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어 파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생산한 뒤 이를 필요로 하게 만드는, 즉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여 상품을 소비하게 만드는 방법은, 일본의 기업가들에게는 미국식 번영의 열쇠 중 하나였다. 마츠시타 코노스케가 미국방문 뒤 일본의 미래를 미국과 같은 ‘중산층’과 ‘소비사회’로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당시 일본기업가와 정치가·관료들의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사실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의 근저에는 이전까지 개발되지 않았던 국내시장이라는 잠재력이 있었다. 인구는 많지만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낮은 수준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었던 일본국민들에게 ‘밝은 생활’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적극적으로 소비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생산확대 및 규모의 경제 실현을 불러왔다. 일본의 소비자 혁명은 다른 집단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에서는 미국과 같지만 미국이 기업중심이었다면 일본은 어디까지나 관제주도였다는 점이 양국의 차이점이다. 정치가와 관료, 그리고 기업이라는 일본 특유의 '철의 트라이앵글'이 빚어낸 고도성장. 일본의 정책생산 방식과 운용(나아가 주체)에 대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다; )
- 하지만 점령군의 정책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재벌에 관한 부분이 그러했는데, 이미 전쟁 전의 공황기부터 재벌과 유착관계를 맺어왔던 관료들은 국가 관료와 대기업의 협조가 경제부흥의 지름길이라고 여겼다. 정치지도층도 이러한 관료들의 의견에 동의했으며 심지어는 좌익 정당조차도 그러했다. 결과적으로 재벌들은 은행을 중심으로 재조직되었다. 사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인 면에서 일본은, 결과적으로 기본적인 골격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이다. 비록 맥아더 장군이 천황제의 존속에 상당부분 기여하는 등 점령정책에 영향력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SCAP의 정책은 워싱턴의 입안자들에 의해 이미 구상된 것이었고,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것들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냉전이 국제정치의 전면에 부상하면서 점령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훗날 ‘역코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냉전이 가져다준, 일미관계의 가장 극적인 전환 중 하나이다. [본문으로]
- 예를 들면 일본정부가 유지하고 있었던 외환이나 기술특허 같은 핵심자원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는 권력의 핵심에 통산성-상공성과 군수성이 전신이었던-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본문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