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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6 22:44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이름 없는 독(名もなき毒)'은 이른바 서민탐정인 스기무라가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시리즈 중 하나다. (사실 스기무라 시리즈라고 보기에는 권수가 좀 적지만.) 평범한 남자 스기무라는, 일본 굴지의 대기업인 이마다(今多) 가의 막내딸이자 외동딸인 이마다 나오코(今多菜穂子)와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되고, 이마다 콘체른과는 연관을 맺지 않는 대신 본사 사보팀의 직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을 위해 나오코의 아버지, 즉 이마다 콘체른의 회장은 스기무라를 회사의 직원으로 삼는 동시에 회사 내에서 출세가도와는 조금의 인연도 없는 부서에 넣어버린 것이다. 어쨌든 스기무라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약했던 부인 나오코의 건강을 제외하면 이 삶에 별다른 불만도 걱정도 없다. 그에게는 부인과 딸 모모코가 세상의 전부이니까.

스기무라 탐정 시리즈는, 사람 좋은 걸 빼면 남는 게 없는 스기무라가 어쩌다보니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면서 조금씩 헤쳐나가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이 책 '이름 없는 독'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날 발생한 무차별 독살 사건. 시크 하우스 증후군. 그리고 사내 사보팀에서 끊임없이 문제만 일으키다 퇴사당하고, 이후 어처구니없는 행각을 벌이는 전 아르바이트생 겐다 이즈미(原田いずみ). 이렇듯, 겉으로 보기에 일말의 관계도 없을 것 같은 사건들은 결국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된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름 없는 독'이 그것.

무릇 거의 모든 독들은 나름의 명칭이 있다. 소설에서처럼 독극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시크 하우스처럼 집 혹은 토지의 문제로 사람이 병들 수도 있으며 이런 것들은 대체로 이름이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를 죽인 독극물의 이름이 무언지, 주택부지를 오염시킨 물질은 무엇인지, 우리는 대체로 이 독들의 이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또 하나의 독이 있으니, 바로 '인간'이다. 타인을 상처입히고, 괴롭히고, 절망에 빠뜨리거나 희망을 앗아가는. 때로는 죽음으로 내몰게 하는. 이 독을 도대체 무어라 명명해야 할까. 하루 중에도 적지 않게 조우하는, 살아가면서 절대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이 독을.

겐다 이즈미는 분명, 독을 가지고 있다. 그 독 때문에 여러 사람을 힘들게 했고 지금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그건 단지 그녀가 보통의, 아니면 정상이 아닌 사람이기 때문일까? 소설 속의 대화를 잠시 인용해 본다.

스기무라: 처음 이 곳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은 겐다 이즈미가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보통 여성이라고 말씀하셨었죠.
키타미: 예,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스기무라: 저는 그 말씀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거짓말쟁이이고, 어떻게 보아도 보통의 인간은 아니지 않을까요.
키타미: 그렇다면, 보통의 인간이란 건 어떤 인간입니까?
스기무라: 저나 당신이 보통의 인간이지 않습니까.
키타미: 아닙니다.
(중략)
키타미: 당신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키타미 씨는 지친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키타미: 이렇게나 복잡하고 귀찮은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때로는 친절히 대해주는데다가 함께 사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지요. 훌륭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스기무라: 저는 그런 게 '보통'이라고 생각합니다.
키타미: 지금은 다릅니다. 그 정도의 일을 해낼 수 있으면 훌륭한 거예요. '보통'이라는 건 지금 세상에서는 '살기 힘들고 별달리 잘하는 것도 없다'와 동의어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보잘것없고, 지루하고, 공허한 것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 어떤 배경에서 비롯되는 것보다도 인간에게서 받는 상처가 가장 크고 깊다. 그리고 상처의 크기와 깊이는 천차만별이겠지만 때로는 회복되기도 힘들다. 수험생일 때에는 공부 때문에 힘들고, 일을 하면서는 그 나름대로 또 괴로울 수도 있으나 거기서 벗어나면 그저 지난 일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죽을 때까지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야만 한다. 그러면서 누군가가 내뿜는 독에 다칠 수도 있고, 또 내가 타인을 주저앉게 할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독은 멈출 줄을 모른다.
 
어릴 때에는 이형의 존재가 싫고 무서웠다. 그리고 지금은 인간이 그러하다. 하지만 우습게도 나 또한 인간이라, 때로는 타인에게 느끼는 참을 수 없는 그 역겨움과 절망을 스스로에게서 발견하고는 한다. 어쩌겠는가. 그래서 나의 삶은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또 어떠해야만 하는지를 찾아내려는 몸부림의 연속인 건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 인간으로서의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왜,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험하게 굴렸더니 좀 많이 낡았다.


사실 그다지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중간에 겐다 이즈미의 행동들이 하도 짜증나서 건너뛰며 읽은 부분도 있고 한 만큼. (솔직히 말하면, 이걸 산 게 재작년인데 재미없어서 대충 굴리며 읽다가 얼마 전에야 다 읽었다.) 다만 인간이라는 독에 대해 고민하는 혹은 생각해보고픈 이에게는 추천할 만 하다. 또한 내가 산 건 일어판이지만 2006년에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나온 걸로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책의 일부 구절을 인용할까 한다.

사람이 사는 한, 그곳에는 반드시 독이 스며든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 바로 독이기 때문에.
그 독의 이름은 무엇일까.
옛날, 어두운 정글을 누비고 다니던 짐승의 송곳니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짐승을 잡아 사자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인간은 그 짐승을 퇴치하는 법을 겨우 찾아냈다.
이름이 붙여지자 모습도 없던 공포에 형체가 생겼다.
형체가 있는 것이라면 잡을 수도 있다. 없앨 수도 있다.
나는 우리 안에 있는 독의 이름을 알고 싶다.
누가 내게 가르쳐다오.
우리가 품고 있는 독의 이름이 무엇인지를.